📑 목차
🏛️ 하라 케이 기념관
일본 최초 평민 재상, 하라 다카시를 기리는 곳
📋 기본 정보
| 기본 정보 | |
|---|---|
| 📍 명칭 | 하라 케이 기념관 Hara-Kei Memorial Museum 原敬記念館 (하라 케이 키넨칸) |
| 🏛️ 유형 | 역사/문화 > 기념관/전시관 |
| 🗓️ 인물 주요 활동 시기 | 하라 다카시 (1856년 ~ 1921년) |
| 🔗 웹사이트 | https://www.mfca.jp/harakei/ |
| 🗺️ 소재지 | 일본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모토미야 4초메 38-25 |
| 이용 정보 | |
| ⏰ 운영 시간 | 정보 없음 (방문 전 공식 웹사이트 확인 권장) |
| 💰 이용 요금 | 성인 200엔 (변동 가능성 있음) |
| ⏳ 추천 소요 시간 | 약 1시간 ~ 2시간 |
| 📞 문의 | +81196361192 |
| 방문 정보 | |
| ☀️ 최적 방문 시기 | 연중 (특별 전시나 생가 개방 기간 확인 권장) |
| 🚗 주차 정보 | 정보 없음 |
| 🚇 대중교통 | JR 모리오카역에서 도보 약 30분 |
| ♿ 접근성 정보 | 휠체어 접근: 정보 없음 경사로/엘리베이터: 정보 없음 장애인 화장실: 정보 없음 장애인 주차 구역: 정보 없음 기타 참고사항: 정보 없음 |
❓자주 묻는 질문
입장료는 얼마인가요?
운영 시간은 언제인가요?
어떻게 가나요?
주소가 어떻게 되나요?
공식 웹사이트가 있나요?
개요
일본 근대 정치사, 특히 '평민 재상'으로 알려진 하라 다카시(통칭 하라 케이)의 삶과 정치적 업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역사 애호가나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주로 방문한다. 이곳은 하라 다카시의 정치 역정과 개인적인 면모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기념관에서는 하라 다카시가 남긴 친필 일기와 서한, 각종 유품들을 직접 관람할 수 있으며, 도쿄역에서 암살될 당시 입었던 의복과 같은 역사적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기념관 부지 내에는 그의 생가가 이축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그의 좌우명이었던 '宝積(호샤쿠)'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의 정치 철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접근 방법
🚶 도보
- JR 모리오카역에서 약 30분 소요된다.
주요 특징
하라 다카시 유품 및 역사 자료 관람
💰 입장료에 포함
하라 다카시 생가 탐방
💰 입장료에 포함 (특별 개방 시기 확인 필요)
'宝積(호샤쿠)' 정신 배우기
추천 포토 스팟
하라 케이 기념관에서 사진 촬영하기 좋은 곳들입니다.
📸 하라 다카시 생가 외부 및 정원
이축된 하라 다카시의 생가와 잘 가꾸어진 정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특히 봄에는 벚꽃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수 있다.
📸 기념관 전시물 (촬영 가능 구역)
하라 다카시의 유품이나 관련 자료 중 촬영이 허용된 전시물을 배경으로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할 수 있다.
📸 기념관 주변 풍경
기념관 건물 자체나 주변의 차분한 분위기를 담은 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계절에 따라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축제 및 이벤트
하라 케이 기념관에서 열릴 수 있는 주요 행사 정보입니다.
하라 케이 추도회 (原敬忌)
하라 다카시 총리의 기일을 맞아 열리는 추모 행사이다. 이와테 현지사 등이 참여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 있는 행사로 알려져 있다. 일본 총리 경험자 중 매년 출신지에서 추도회가 열리는 것은 하라 다카시가 유일하다는 언급이 있다.
📅 매년 11월 4일 전후
하라 다카시 생가 특별 공개
평소에는 외부 관람만 가능한 하라 다카시의 생가 내부를 특별히 공개하는 행사이다. 봄철에는 '다타키자쿠라(奥州里桜)'라는 벚꽃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다.
📅 봄철 등 특정 기간
방문 팁
역사적 배경
여담
하라 다카시는 '평민 재상'으로 불렸으며, 여러 차례 서작(작위를 받음) 제의를 받았으나 평민의 입장을 고수하며 모두 거절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그의 보제사(조상의 위패를 모신 절)는 황벽종 사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암살범 나카오카 곤이치는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종신형을 선고받고, 13년 복역 후 1934년에 석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라 다카시는 유언으로 자신의 일기인 '하라 일기(原日記)'를 일정 기간 후 공개하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 정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그의 신장은 약 168cm로,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당당한 체구였다고 전해진다.
스스로 '일산(一山)'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메이지 유신 당시 '조적(朝敵)'으로 몰린 고향 난부 번과 도호쿠 지방의 설움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과거 기념관 방문객에게는 가야나무 씨앗을 기념으로 제공했다는 언급이 있다.
대중매체에서
하라 케이 기념관 또는 하라 다카시 관련 정보가 등장한 주요 대중매체 정보입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 후기는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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